전문가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소담 한꼬집’ ] 한 해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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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되면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어떤 해가 그렇지 않았을까마는 전 세계를 강타한 코비드로 인해 세상은 아직도 몸살을 앓고 있다. 각자의 입장과 형편이 다르겠지만, 내 저울은 ‘多事’ 보다는 ‘多難’ 쪽으로 무게가 기울었다. 들려오는 뉴스가 무거웠고, 롱비치 항에 발이 묶인 컨테이너처럼 풀리지 않는 경제가 무거웠고, 인플레이션의 파고 속에서 직원들의 밥술을 책임져야 하는 삶이 무겁기만 했다. 이제 좀 자유로워지나 싶었는데 PCR 검사로도 안 잡히는 스텔스 오미크론 변이가 발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앞이 캄캄해지는 형국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8천 불이면 들여오던 컨테이너 배송비가 3만 7천 불로 올랐다. 거기가 끝이 아니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물가 때문에 원가는 계속 올라가고 소비자들의 원성은 높다.
렌트비며 나가야 할 돈은 많은데 장사가 안되니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분의 소식을 들었다.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목숨은 건졌으나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보이지 못해 삼켰을 눈물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어떤 이유로든 벼랑 끝에 서 본 사람은 안다. 코너에 몰리면 가여운 나 자신만 보인다는 것을. 생과 사의 문턱에서 느끼는 깊은 외로움과 상실감이 자식과 부모를 앞서가게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딸기 시럽이 잔뜩 올려진 와플이 캡슐을 빠져나온 항생제처럼 쓰디썼다. 이 출구 없는 터널의 끝은 대체 어디일까?
코비드가 기승을 부렸던 2020년 4월, 사촌오빠가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로컬 뉴스가 떠들썩했고 올케의 인터뷰 영상이 올라왔었다. 모이는 것에 제한을 두었던 때여서 장례식 참석은 불가했다. 그렇게 오빠를 보내면서 코비드는 기저질환자나 특정 계층만 걸리는 게 아니라 내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섭고 두려웠다. 어느 시점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같은 뉴스를 듣다 보니 코로나 확진자나 사망자 숫자에 둔감해졌다. 현재 진행형이라는 걸 망각했던 모양이다. 현실로 돌아오니 또다시 뉴스가 무겁다. 필요하다면 백신이라도 맞고 안전수칙을 지키며 조심해서 사는 방법 외에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엔 백신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백신이 나온 후엔 내 차례가 오기 전에 약이 없어지는 건 아닐까 불안했었다. 백신만 나오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1, 2차를 맞고 난 후에도 여전히 마스크를 벗지 못했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쓰면 아픈 사람이 아닌지 의심을 받을 만큼 좋아졌을 때 역시 그랬다. 망설이다 어제 부스터 샷과 독감 주사를 맞았다. 밤새 열이 오르고 온몸이 아팠다. 살겠다고 타이레놀을 계속 주워 먹었다. 하늘이 부르면 기쁘게 가겠다던 말은 거짓이었다.
행사와 개인적인 볼일로 LA에 다녀왔다. 간 길에 의사가 된 친구 딸내미를 만나고 오려 했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종일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고 했다. 코로나 환자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아직도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고 앓다가 죽기도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지인이 식당 갈 때마다 매번 지갑에서 꺼내는 것도 일이라며 백신 카드와 면허증을 나란히 놓고 사진을 찍어 핸드폰에 저장하라고 알려주었다. 그걸 보여주어야 입장과 먹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웃기는 건 제대로 확인한 건가 싶을 정도로 대충 본다는 거였다. 위에서 하라니까 하는 것이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딱히 효과는 없어 보였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마스크를 뺀 채 대화하고 음식을 나눠 먹다가 나갈 때가 되어서야 마스크를 쓰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나마 안전수칙을 잘 지키는 건 공항과 비행기 안이었다. 그러니 남 탓 말고 스스로 조심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독일에 사는 지인이 월초에 한국에 갔다. 사흘 뒤부터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기격리를 시행한다는 뉴스가 발표된 시점이었는데, 혹여 민폐가 될까 봐 스스로 행사에 가지 않았다.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작년에 수술하러 갔을 때는 더 심했다. 가족 친지조차도 서로 확진자일까 봐 의심하고 경계하던 시기여서 누구를 만나는 것도 눈치 보이고 나다니는 것도 불편했다. 외국에서 온 사람을 마치 병균 덩어리 취급하며 경계하는 눈초리가 빌딩사이를 휩쓸고 가는 칼바람처럼 서늘했다. 같은 시기에 한국에 갔던 지인은 친정 언니가 하는 미용실에 갔다가 문전 박대를 당했다. 미국에서 온 사람 다녀갔다는 소문이 나면 미장원 문 닫아야 한다며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코로나검사를 하여 음성판정을 받고 자가격리를 했음에도 홀대를 받았다.
한국에서 갈 곳이 없는 사람은 나라에서 지정한 격리소에 가야 했다. 호텔을 통째로 빌려 격리 장소로 사용했는데 건물 앞에는 24시간 경찰들이 지켰다. 방문 앞 바구니에 넣어둔 도시락 가져올 때를 제외하곤 복도에도 나가면 안 되고 택배나 배달 음식 반입도 할 수 없었다. 공짜도 아니고 이백만 원 정도를 내는데 음식은 형편없었고 직원들은 사무적이고 불친절했다. 4개 국어로 나오는 방송의 지시를 따라 행정안전부에 열을 재서 보고하거나 밥을 먹어야 하니 감옥이 따로 없구나 싶었다.
답답할 때마다 창밖으로 한국은행 증축 현장과 중앙우체국, 명동 신세계백화점 앞 광장을 바라보았다. 창밖의 사람들은 모두 자유로운데, 자유라고는 없는 그곳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니 신세가 처량했다. 친정집 없는 게 서럽고 돌아가신 친정엄마도 그리웠다.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그때 ‘김 씨 표류기’라는 영화 속 주인공이 문득 떠올랐다.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던 그는 도심 한가운데 있는 밤섬에 홀로 갇혀 살게 되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도움의 손길을 보내도 유람선에 탄 사람들은 그저 무심히 손을 흔들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 영화가 시사하고자 했던 내용과 내 현실이 상황은 다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창작촌에 들어가 글만 쓰는 작가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2주를 그런 작가처첨 살아보겠다 작심하고 갔는데 100% 활용하진 못했다. 하지만 혼자 있어도 할 일이 무궁무진한 작가라는 직업이 나쁘진 않았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 만든 밤섬에서 이미 자가격리를 하며 살았고 또 그렇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엘에이에 왔다고 지인이 드라마 ‘올인’의 촬영지 ‘Palos Verdes’에 데려다주었다. 결혼식을 하려고 송혜교가 이병헌을 기다렸던 ‘Wayfares Chapel’을 갔는데, 마침 결혼식이 진행 중이었다. ‘Abalone Cove’와 세상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에 있다는 ‘Golden Cove Shopping Center’ 내의 ‘STARBUCKS’도 갔었다. 스모그 때문에 청명한 바다는 보지 못했지만. 해풍과 태평양이 숨통을 열어주었다. 힘들었던 속내를 덜어냈으니 새로운 것으로 채우며 살아야겠다.
올 크리스마스엔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년에는 다사다난했던 해였다는 말 대신 행복했던 해였다는 말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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