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박인애의 소소하고 담담한 이야기] 북캉스

페이지 정보

작성자 NEWS
문화 댓글 0건 조회 443회 작성일 25-01-24 12:32

본문


박인애 (시인, 수필가)

  9년 전, 다운타운에 있는 책방 ‘Deep Vellum’에서 “Blind Date with a Book”이라는 팻말이 붙은 진열대를 처음 보았다. 그곳에 진열된 책들은 누런 소포지로 포장한데다 노끈으로 묶어 놓은 지라 무슨 책이 들었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해시태그처럼 겉장에 적힌 몇 개의 키워드만으로 책을 고르고 사는 신기한 문화를 접하게 된 거다. 얼굴도 모른 채 맞선을 보았던 윗세대처럼, 정보가 전혀 없는 책과 독자가 소개팅을 할 수 있도록 서점이 중매쟁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책이 나올까 봐 걱정스럽긴 했지만, 어떤 작가의 작품일까, 어떤 내용일까를 상상하며 고르는 즐거움과 설렘이 좋았다. 운이 좋으면 평생 모르고 살 뻔했던 작가를 알게 되고, 좋은 작품을 만나는 대어를 낚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요즘 서점에 가보면 “Blind Date with a Book” 코너가 제법 크다. 책 포장지도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문구가 이미 인쇄되어서인지 선뜻 정이 가지 않는다. 소포지에 마커로 쓴 손 글씨가 강렬하게 와 박혔던 모양이다. 그래서 새로운 게 낯설다. 좋은 문화는 어떤 경로를 통하든 퍼져 나가기 마련이다. 발 없는 문화가 한국에도 정착하여 이제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책방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그 책의 매력은 설렘과 레트로 감성이 아닐까 싶다. 


  책은 또 다른 문화를 창출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배경을 바탕으로 크고 작은 테마파크를 만든다든지, 영화나 연극으로 재탄생 시키는 일이다. 그중 영국의 해리포터 스튜디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SNS에 책을 소개하거나 평하는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등도 많아졌고, 북클럽, 북토크도 많아졌으며 책을 매개로 한 문화상품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책 속 캐릭터나 글귀를 이용해 옷, 팬시용품, 문구류를 만드는 건 오래전부터 있었던 거라 익숙한데, 작년 9월 한국에 갔을 때 보니 대기업들이 협업하여 만든 문화상품이 제법 많았다. 스타벅스 코리아와 펭귄 랜덤 하우스 출판사가 콜라보 해서 내놓은 『모비딕』 굿즈는 인기가 많았는지 사려했던 텀블러는 품절이었다. 


  예스24와 이마트24가 협업하여 ‘달러구트 꿈 백화점 넛츠 쿠키칩’을 출시했다. 책 속에 나오는 음식을 현실화하면 어떤 맛일지 궁금해하는 소비자의 심리를 제대로 공략하여 인기를 끌었다. 이미예 장편소설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 나오는 심신 안정용 쿠키를 상품화했다기에 궁금해서 사러 갔는데. 그 또한 사지 못했다. 나처럼 아파서 잠 못 드는 사람들을 위해 67쪽에 나오는 숙면 사탕을 상품화하면 잘 팔리지 않을까 싶다.


  앞의 내용과는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지난 시즌 성황리에 방영된 넷플릭스 요리 경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에서 ‘만찢남’이라는 닉네임을 달고 나온 조광효 요리사는 만화책 속의 음식을 현실화시켜 성공한 사람이다. 최강록 요리사도 '마스터셰프 코리아 2'에서 우승할 때 만화에서 요리를 배웠다고 밝힌 바 있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현장을 지켜보며 감동한 시청자들이 흑백요리사 관련 서적을 사면서 판매량이 수직상승 하는 기현상을 낳기도 했다. 


  지난가을에 북캉스라는 처음 들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여기저기에서 북토크가 이뤄지던 즈음이었다. 서울신라호텔이 책과 함께 휴식을 취하는 ‘북캉스(북+바캉스)’ 패키지를 ‘어쩌다 책방’과 협업하여 내놓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불경기라고는 하나 좋은 아이디어로 틈새시장을 파고들어 시도해 보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콘텐츠나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도 노하우다. 불경기라고 주저앉아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지인이 크리스마스 무렵에 친구들과 게이로드 텍산 호텔로 호캉스 간다며 오고 싶으면 오라고 했다. 세 분이 한강 작가 책을 한 권씩 사서 편히 쉬며 읽고 돌려 볼 예정이라고 했다. 작가인 나도 안 해 본 북캉스를 하러 호텔을 가다니, 보통 멋진 노인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이젠 몸이 아파서 웃돈 얹어주어도 못 가겠지만, 노트북 싸 들고 시원한 호텔에 틀어박혀 장편소설을 쓰는 지인들이 부러웠었다. 환경 때문에 못 쓴다는 건 핑계다. 쓸 사람은 어디서든 쓰게 되어 있다. 


  사고 후유증으로 운전을 못 하니 집에 틀어박혀 책과 노는 중이다. 얼마 만에 누려보는 호사인지 모르겠다. 맡았던 직책도 내려놓는 중이다. 봉사도 못하면서 이름만 올려놓으니 부담스럽다. 건강했을 땐 일도 아닌 것들이 건강을 잃으니 일로 다가온다. 생각이 온통 통증으로만 갈 때는 쉬어 가는 것도 지혜다. 올겨울은 책과 만나보려 한다. 북캉스를 꼭 호텔에서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나는 무엇을 창출해 낼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 테네시주(Tennessee)에서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텍사스의 광활한 대지도 아니고 콜로라도의 장엄한 산새도 아니며 뉴욕처럼 인류가 만날 수 있는 화려한 인공미도 아닙니다. 단지 수수하게 그 모습을 남에게 보일 듯 말…
    문화 2025-08-28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email protected]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잭슨홀 회의는 와이오밍주에 미국을 대표하는 엘로우스…
    세무회계 2025-08-28 
     김미희 시인 / 수필가 축구장을 찾은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박찬호와 추신수 덕분에 야구장은 여러 차례 가보았지만, 축구장은 쉽사리 인연이 닿지 않았다. 더구나 한여름의 땡볕 아래 달라스의 경기장을 찾은 것은 내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경기는 저녁 7시 30분에…
    문화 2025-08-28 
    조나단 김(Johnathan Kim)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졸업- 現 핀테크 기업 실리콘밸리   전략운영 이사매년 봄, 미국 전역의 고등학생과 학부모들은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합격자 발표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특히 SAT나 ACT 시험 정책 변화와 코로나 …
    교육상담 2025-08-22 
    주택보험의 주요혜택이광익(Kevin Lee Company 대표)코로나사태와 더불어 지속되는 낮은 이자율은 많은 사람들에게 집을 사거나 재 융자  심지어 좀더 큰 새 집으로 이사하도록 자극제 역활을 해왔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한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막상 집을 산다고…
    보험 2025-08-22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 테네시주(Tennessee)의 아침은 상쾌합니다. 때묻지 않은 싱싱한 환경도 그러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한국의 산천을 닮은 모습들이 스쳐가는 여행자의 시선을 확 끌어 잡습니다. 어딜 가더라도 웅장하진 않지만 자연스런 곡선의 굽이 …
    문화 2025-08-22 
     공인 회계사 서윤교          최근 들어 우리 교포사회에서 두 가지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다.  첫째는 한국을 여행한 뒤 미국에 입국할 때, 세관 심사관이 “해외금융계좌 신고(FinCEN Form 114, 흔히 FBAR라고 부릅니다)를 했느냐”를 물었고, “아직…
    세무회계 2025-08-22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2020년 갑작스레 닥친 코로나 사태로 수 개월간 사무실에 가지 못하고 재택근무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강의…
    문화 2025-08-22 
     박인애 (시인, 수필가) 오랜만에 전축을 열고 비틀즈 판을 올렸다. 야전이라고 불리던 야외용 미니 전축인데, 바늘이 LP판을 긁으며 흘러나오는 소리가 정겹다. 요즘 음원의 깔끔한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약간의 잡음, 떨림, 그리고 의도치 않은 미세한 …
    문화 2025-08-22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무더위가 한참인 텍사스를 탈출하여 캘리포니아 북부에 있는 높이 치솟은 나무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잎새 사이로 스며드는 빛을 통하여 작은 별빛을 꿈꾸며 서 있는 레드우드 국립공원(Redwood National Park and St…
    문화 2025-08-15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email protected]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2025년 7월에 트럼프 행정부가 발의하여 서명된 …
    세무회계 2025-08-15 
    엑셀  카이로프로틱 김창훈 원장 Dr. Chang H. KimChiropractor | Excel Chiropracticphone: 469-248-0012email: [email protected] MacArthur Blvd suite 103, …
    문화 2025-08-15 
    김재일 (Jay Kim) 대표현 텍사스 교육청 (TEA) 컨설팅전직 미국 교육부 (U.S Department of Education) 컨설팅전직 텍사스 공립학교 교장지난주 OpenAI가 ChatGPT-5 모델을 출시하면서, 전 세계 언론과 교육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
    교육상담 2025-08-15 
    고대진 작가◈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순대와 …
    문화 2025-08-15 
    크리스틴 손, 의료인 양성 직업학교, DMS Care Training Center 원장(www.dmscaretraining.com / 469-605-6035) “환자와 의료진 사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하는 사람”병원에 입원하면 환자와 가장 자주 접하는 의료 인력은…
    교육상담 2025-08-08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