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이슬같이 기꺼이 죽으리라 - 6·25 전쟁 7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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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창문가의 맑은 유리병에는 월명초, 스킨답서스, 하트아이비, 아프리칸 바이올렛, 고무나무가 또 다른 삶을 준비하느라 뿌리내리기 바쁘다.
뒷마당에는 아름이 넘는 몸통에 오층보다 높은 키의 피칸나무는 아직도 건장해서 열매 맺고 온갖 새와 다람쥐의 안식처가 된다.
텃밭에서 크는 여러 채소들과 작은 꽃이 귀여운 잡초들. 흙속의 각종 벌레. 꽃에 모여드는 낯선 곤충들의 신비로움과 반딧불은 쉼표 없이 살아온 이민 삶에 느낌표를 더해주니 고맙다.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이 터전이 되어주고 뿌리를 내려 새 세대를 준비하는 공생의 섭리.
올해는 6·25 전쟁 70주년. 한 피 나눈 형제임에도 빈틈없는 준비로 갑자기 쳐내려온 동족상잔의 비극. ‘신생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참전한 앳된 청년들의 푸른 젊음이 붉게 불든 우리 국토.
일제의 수탈로 망가진 금수강산은 북괴의 망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손바닥만 한 땅에서 3년간 밀고 밀리며 죽고 죽이는 국제전에서 이슬처럼 사라진 17만의 숭고한 희생.
숫자에도 들지 못한 채 무명초처럼 떠난 사람들과 밝히지 못하고 피맺힌 삶을 살아낸 사람들. 실향민들과 이산가족, 수많은 고아와 혼혈자녀들과 남겨진 여인들. 뿌리 채 뽑히고 꺾였지만 초토화된 본토와 타국에 흩어져서 피땀으로 뿌리내리느라 애쓰던 금쪽같은 시간들.
1988 하계올림픽과 2018 동계올림픽 개최국가로 성장하며 IT강국으로 부상한 대한민국. 그런데 그렇게 비위를 맞추어 주었음에도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북한.
판문점 정상회담으로 태어나 남북한 당국자들이 상주해서 근무하며 교류하고 소통하던, 단순한 건물만이 아닌 국민의 마음과 혈세 100여억 원에 불을 질렀다.
이런 상황에 맞이하는 6·25. 아직도 살아남은 이들의 몫은 후손들에게 알려야 할 일이다. 6·25 전쟁 추념음악회를 ‘불망(不忘)음악회’로 개최한 ‘비목’ 작사가 한명희 전 국립국악원장은 “올해부터는 죽을 때까지 6·25 전쟁 추념음악회를 할 거예요. 지금 우리 나라에는 6·25 전쟁을 기리는 행사가 거의 없어요.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아 하는 것 같아요. 과거의 불행을 잊어버리면 그 불행이 또 재연됩니다. 6·25 전쟁의 비참함을 회상하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경각심을 가지게 돼요. 6·25 전쟁에 대한 국내외 시·소설, 종군기자들의 기사, 수필, 영화 등을 수집해서 한국전쟁에 대한 모든 기록을 볼 수 있는 6·25 전쟁 문예 기념관을 만들고 싶어요.”
2년 전인 2018년에 “교과서엔 여성의용군 언급이 한 줄도 없어 어느 6·25 단체에 물어보니 “그런 게 있었나요?”라는 대답을 들은 7명의 청년은 ‘우투리’처럼 숨겨진 참전용사를 알리고 싶어 ‘여성의용군 기억의 시작’이란 프로젝트를 게시해서 학생들에게 알리고 있다고 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현재까지 확인된 참전여군은 2,400여명이다. 육·해·공군과 간호장교 2,037명, 군번 없는 학도의용군 600여명, 군번과 계급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활동한 이들이 대부분이라 밝혀지지 않은 사례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나이에 포화 속으로 뛰어든 학도 의용군부터 적진에서 게릴라전을 펼친 유격대원, 전투의 숨은 공신이 된 교사까지 여전사들의 활약은 다양했다. 국가와 가족을 지켜야한다는 신념만큼은 모두 다를 바 없었다.”
여러 신문사의 70주년 특집인 ‘아직 살아계신 참전여군들의 이야기’ 중에서 발췌했다.
- 김명자 님은 “수송기를 타고 평양상공에서 전단지 살포작전을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부모님이 반대했죠. 밥상이 마당으로 날아가고, 그런데 갔어요.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 국민학교 교사였던 이인숙 님은 여자만 편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입대. 산중포복에 권총과 M1총을 둘러매고 더 특수한 교육을… 혹독한 훈련 끝에 육해공군 군악대와 매주 군악대 행진을 하며 사기진작과 피난민들 위로하다 육군본부에서 행정업무를 했는데 인민군여군만 봤지 한국여군은 보질 못했으니 돌팔매질에 ‘저 사람들 죽이라’고 할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였어요.”
- 일본 도쿄도에 거주하는 송순자님은 제주도에서 임시 교사하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19세의 나이에 군인이 됐다. “진해에 있던 여군 훈련소에서 기초군사, 사격훈련을 받았고 훈련이 끝나면 밤에 총 들고 불침번 근무를 서는데, 나이가 어려서 불안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 이복순 님은 17세에 시집 3권을 가지고 자원입대. 서로 쳐다만 봐도 웃음이 새어나왔던 소녀병사들은 한 명이 더 들어갈 큰 남자군복을 입고 뛰며 맹추위와 배고픔을 떨치려 목청 터져라 군가를 불렀다며 총이 없어서 나무 작대기로, 수류탄대신 돌멩이로 훈련했다고 했다.
- 박순애 님은 8240부대 소속인 황해도 구월산부대에서 활동한 민간유격대 여군이다. 피난길에 부대에 들어가게 됐다며 여자부대장만 권총을 지녔고 20여명의 여군은 총 없이 “막대기와 돌로 인민군 머리를 때리며 싸웠다”며 “군번 없는 군인, 총 없는 군인이었다”고 말했다.
1950년 8월부터 1기 육군 여자의용군 500명 선발에 2,000여 명이 지원했는데 논술과 면접 불합격자들은 주저앉아 고무신으로 바닥을 치며 울었다고 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임에도 어른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 잊어가고 아이들은 모르고 자라는 유일한 분단국의 슬픈 전쟁사.
특히 남존여비사상이 남아있었고 이념과 가족생사의 회오리 속에서도 용감하고 지혜로웠던 그 당시 어린 여자들의 충정에 목이 멘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 조국의 앞날이 양양하도다 /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기꺼이 죽으리라 (국군의 군가-양양가, 충정가)”
김정숙 사모
시인 / 달라스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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