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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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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세이]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
“준비했어?”
“응, 근데 너무 늦지 않았나?”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남편은 다짜고짜 묻습니다. 그리고는 샤워장으로 사라집니다. 며칠 전부터 약속을 정하고 몇 번이나 확인하던 터라 미리 준비하고 툴툴거리며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오늘 남편은 두 차례 출사를 다녀온 것입니다. 7시쯤 나갔다 10쯤 들어와 다시 준비하고 나갔던 12시 결혼촬영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 모양입니다.
집에서 킴벨 아트 뮤지엄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립니다.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 다음주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내 말에 남편은 기겁을 합니다. 미루고 미뤘던 미술관 나들이를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꼭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술관에 들러 르누아르 특별전을 보고 둘이서 저녁을 먹고 미술관에서 가까운 미국 교회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뮤지컬을 보고 돌아오는 것이 오늘의 데이트 코스라고 합니다.
한 달 전쯤에 교통사고를 내고 비에 젖은 나목, 딱 그 꼴로 의기소침해진 내가 보기 싫었는가 봅니다. 예기치 않게 차를 바꿨으니 시승을 해봐야 한다면서 어울리지 않게 너스레까지 떨고 있습니다.
한집에 살면서도 서로 바쁘다 보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할 이야기도 별로 없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깜빡거리기까지 하니 생각날 때마다 잊어버리기 전에 전화로 물어보고 답하니 얼굴 보고 할 얘기가 더더욱 없지요. 그러다가 가끔 이렇게 나오면 그동안 속에 숨어 있어 보이지 않던 말들을 꺼내놓습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편한 친구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흉이 되지 않으니 신경쓰며 말하지 않아도 되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으니 꾸밀 필요도 없지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다가 일이 생기면 의기투합해서 해결하니 전우가 따로 없습니다.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가차없이 꾸짖고 또한 조언을 잊지 않습니다.
가끔 이유도 모른 채 화풀이 대상이 되어주기도 하니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전천후 내 편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미술관에 도착했습니다. 관람시간이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아 걱정했는데 쉽게 주차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가 봅니다.
석 달 전에 한국에서 오신 두 작가님과 엘에이에서 오신 두 작가님을 모시고 왔던 일이 생각납니다. 갑자기 엉덩이에서 통증이 올라옵니다.
그 때 어쩔 수 없이 남자 세 분과 함께 넷이서 뒷좌석에 앉아야 했지요. 겨우 엉덩이 한쪽만 걸쳤던 터라 탈이 났던 것이 아직도 낫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옆에 앉았던 분도 아마 허리에 탈이 나고도 남았을텐데 미안해서 여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은 르누아르 특별전을 하는 줄도 모르고 갔지요.
횡재하는 날이구나! 밤새 무슨 꿈을 꾸었던가! 떠올리며 얼마나 기뻤던지요. 하지만, 넓은 주차장을 몇 바퀴 뱅글뱅글 돌다 겨우 주차하고 들어갔는데. 웬걸요. 입장을 기다리는 끝도 없는 긴 줄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연 스케줄 때문에 포스터 옆에서 기념촬영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요. 생각지도 않았던 르누아르 작품전을 본다고 다들 흥분했는데 정말 아쉬웠습니다.
먼 길 오셨으니 추억거리 만들어준다고 벌인 일이었는데 여섯 명이 한 차로 움직이느라 고생만 시켜드렸지요. 르누아르 그림이 담긴 포스트 카드라도 사서 안부인사 드려야겠습니다.
르누아르는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화가입니다. 르누아르, 그 이름만 떠올려도 생각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딱히 그림에 관심도 없던 내게 몽환적이면서 밝고 맑은 그의 그림을 좋아하게 만든 친구이지요.
생각해보니 그 친구와는 참 많은 것을 함께 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나 3년 동안 이팔청춘에 겪어야 했던 모든 것을 함께 했으니까요. 벗어서 보여준 적도 없는데 아픈 곳을 잘도 찾아내 빨간약을 발라주던 친구였지요.
특별전에는 누드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후기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피카소와 마티스, 샤갈과 보나르 등의 작품도 여럿 전시되어 있어 화풍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남편이 들려주는 작품설명이었습니다. 따라다니며 속삭이듯 소곤소곤. 물론 낯익은 풍경은 아니었지요. 그림이나 사진이 화제에 오르면 코가 벌렁거리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신바람이 납니다.
오랜만에 그런 표정을 보니 처음 서산극장에서 마주쳤던 그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마감시간을 알리는 벨 소리를 들으며 미술관에서 나왔습니다. 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다는 월남 국숫집으로 내비게이션도 없이 달려갔습니다.
우리 동네 월남식당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바가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마가리타를 앞에 하고 마주 앉으니 낯선 곳으로 데이트 나온 연인 같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낯이 붉어지던 때가 있었지요. 가슴이 뛰던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지요. 가을비 받아마신 나무처럼 물이 들던 때가 있었지요. 물이 들어 웃음이 붉어지던 때가 있었지요.
서로의 낯빛에 얼굴 비춰보며 마음이 안 보일까봐 옷을 하나씩 벗어 내렸지요. 어린 속살까지 꺼내 조잘거렸지요. 낙엽처럼 함께 떠내려가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요. 마가리타 한 잔에 물이 들어 옷을 또 벗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다 벗었는데도 더 벗으라고 악다구니할 때도 많았습니다. 벗은 마음을 보고 흠집만 찾던 때 또한 많았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은 대로 보았으니 그럴 수 밖에요.
나이 들수록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은 그냥 대충 보고 살라는 것인가 봅니다. 르누아르의 그림처럼 각을 세우지 않고 몽환적으로, 그렇지만 햇살을 받아마신 듯 밝고 맑게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어두워지기 시작한 사방은
세월 때문이 아니었다
세월은 이미 거기에 남아있지 않고
우수수 떠나고 없다
가을비 몇 방울 받아 마시던 날
몸은 이미 붉은 물이 들기 시작했고
물이 들어 웃음이 붉어지는 순간부터
서로의 낯빛은 얼굴을 바꾸어가며
그래도 마음이 보이지 않을까 봐
옷을 벗으며 되뇌었다
물이 든다는 것은
옷을 벗기 위해
어린 속살까지 꺼내 조잘거려야 하는 것이라고
바람이 억지웃음으로 조각해 낸 브로치를
왼쪽 가슴에 핀으로 박았다
깊이로부터 선혈이 찔끔 나왔다
표백되지 않고 검어져버린 응고(凝固)력이
벌거벗은 몸에 옹이로 두엇 남았다
남은 숨소리보다 아득한 기억만으로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해 홀로인 몸을
강물에 비춰본다
여인은 그냥 그대로
천 년 묵은 기억을 벗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분해지고 있다
김미희, (나목) 전문
김미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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