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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칼/럼] 원시인의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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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EWS
문화 댓글 0건 조회 211회 작성일 25-05-23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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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

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

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

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


자녀 교육을 조언해주는 전문가들이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릴 때 책 읽는 습관을 길러줘야 한다는 것이다. 책 읽기가 교육적으로 매우 유용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기르기 쉬운 습관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책 읽기가 어렵고 귀찮을 때도 있지만, 문명사회를 이룬 인간은 지식과 역사를 문자로 축적해 왔고 이 자산은 후대에 이어지며 기껏해야 100년 정도 살 수 있는 인간 각 개체는 수천 년의 지적 자산을 향유하며 번성하고 있다. 

책을 읽는다는 건 문명인의 특권이다. 인류는 5000년 전에도 문자를 사용했지만,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15세기 이후에야 다량으로 인쇄된 책을 일반인들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문명이 발달하기 전 인류에게 책을 선물한다면 어떻게 될까? 글도 언어도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으니, 책을 주더라도 읽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책 읽기에 필요한 기본적 지식과 기술, 즉 언어와 문화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선사시대의 인류는 지금의 인류와 달랐을까? 다시 말해 그들은 두뇌는 책 읽기에 부족했을까?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생물학적 준비성(Biological Preparedness)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뱀을 보면 선천적으로 혐오를 느끼고, 떨어져 본 경험이 없어도 높은 곳에 가면 두려움을 느끼는 등의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심오한 사고 과정이나 논리적 추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능에 가깝게 외부 자극에 자동적인 반응을 보이는 일련의 메커니즘을 뜻한다. 이 메커니즘은 신경 전달 물질이나 DNA 등 우리의 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하드웨어에 이미 녹아있다.

생물학적 준비성을 조금 확장하여 생물학적 가능성(Biological Possibility)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직립 보행이 가능하다. 몸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며 이것은 유전자로부터 나온다. 물고기는 아가미 덕분에 물속에서 호흡할 수 있고, 새는 가볍고 날개가 있어서 날 수 있다. 모두 하드웨어가 가능성과 한계를 규정한다. 사람의 고등한 사고 능력도 사실 우수한 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뇌는 신경 세포의 양, 밀도, 그리고 신경 세포 간의 연결 방식에서 다른 동물의 뇌를 압도한다.    

생물학적 가능성에서 하드웨어의 중요성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항상 하드웨어가 우선 하는 것은 아니다. 1950년대까지 세계 육상계에는 한가지 통념이 있었다. 인간의 육체로는 1마일을 4분 안쪽으로 달리 수 없다는 것이다. 의학 공부를 했던 영국의 육상 선수 로저 베니스터는 의학 지식을 이용해 이 한계에 도전했고, 1954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열린 육상 대회에서 3분 59초 4라는 기록으로 4분 벽을 깼다. 놀라운 것은 이 사건 이후로 4분 기록을 깨는 선수들이 짧은 기간 동안 많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4분 벽은 생물학적 한계가 아니라 심리적 한계였음이 드러났다. 

고고학과 유전학연구에 따르면 수만 년 전 원시인의 뇌와 우리의 뇌는 생물학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같은 환경에 노출되면 비슷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원시인 아기가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로 오면 현대인으로 자라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즉 생물학적 가능성에 있어 원시인의 뇌는 책을 읽는 능력을 이미 내포하고 있으나 환경이 그 가능성을 발현할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이다. 

어른 원시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독서를 비롯한 다양한 지적 활동이 그에게는 상상 불가능한 대단한 일로 보이지 않을까? 마치 천재 수학자의 수학 강의를 듣는 일반인들의 심정과 비슷하리라. 그러나 원시인이 우리처럼 지적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두뇌에 생물학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환경이 갖추어지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수준의 지적 활동을 할 수 있다. 

시간의 프레임을 ‘과거-현재’에서 ‘현재-미래’로 바꿔보자.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5만 년 뒤 미래로 가서 인류를 관찰한다면? 5만 년 전 원시인이 우리의 모습과 행위를 상상할 수 없듯이 우리도 5만 년 뒤 인류가 무엇을 할 수 있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폭이 얼마나 클지는 상상할 수 있다. 수렵, 채집으로 살아가던 원시인에게 독서라는 행위가 줄 수 있는 충격과 비슷할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5만 년 뒤 인류에게는 여러 가지 능력이 있을 텐데,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어렵고 상상 불가능한 그 무엇일 것이다. 우리의 몸과 뇌와 DNA는 충분히 그것을 해낼 수 있지만, 단지 문화와 환경이 준비되지 않아서 발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조금만 시간의 범위를 줄여서 이야기를 마무리해보자. 최근 급속도로 발전한 인공지능으로 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의 일자리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매우 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인류에게는 인공지능과 함께 더욱 번성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이 두뇌에 이미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지 않을까? 너무 낙관주의적인 발상일까? 

우리가 해 본 적이 없는 일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상상을 멈추지 말자. 상상이 우리 속의 가능성을 해방시키리라 믿는다. 우리의 뇌는 이미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원시인의 독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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