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고대진]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DKNET
문화 댓글 0건 조회 162회 작성일 25-10-17 19:41

본문

고대진 작가


◈ 제주 출신

◈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 에세이집 <순대와 생맥주>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쉬는 일’이라고 말하겠다. “아니 쉬는 일이 가장 쉽지, 뭐가 어려워?”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건 대학만의 특별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교수들에게 물어봐도 비슷한 답이 나올 것 같다. 어려운 ‘쉬는 일’이라. 학교에서 수업을 끝내고 집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쉬면 될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문제는 학교에서 생각하던 논문 생각이 떠나지 않고 이것을 마무리 짓는 일, 제출해야 할 논문 마감일, 학생 연구를 비평해주는 일, 마감일에 맞춰 연구비 신청하는 일, 다음날 수업 계획 등등에 생각이 항상 머물러있어 편히 쉴 수 없다는 데 있다. 퇴근하고도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자꾸 뒤처지는 느낌이 들어 초조해지고 저녁 후에 티브이 앞에 앉아서 뉴스를 보거나 할 때도 계속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일을 떠나려고 여행을 가도 책이며 공부할 논문들을 가방에 잔뜩 집어넣어야 안심이 된다. 그렇다고 그걸 다 읽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운동할 때 또 그림을 그릴 때 잠깐씩 일을 잊을 때가 있지만 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내던 날들이 있었든가 생각해보니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일은 내 삶의 중심이었고 내 휴식이다. 그러니 가끔은 월요일에서부터 금요일에 걸쳐 8시부터 5시까지 근무하는 근로자들이 부러울 때가 있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면 그 일을 다 잊어버리고 쉴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편할까 하는 생각을 해서다. 


최근에 작가 한강의 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다가 이 시인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여서 이런 시를 짓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다. 전업 작가로 살면서 작품을 쓰다 보면 언제 쉬는 시간인지 언제 일하는 시간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워지고 24시간 작품 생각만 하게 되지 않을까? 특히 ‘작별하지 않는다’같은 대작을 쓰면서는 제주도에 따로 집을 빌려 몇 년간 글을 썼다는데 그러다 보면 일에서 벗어나 긴장을 풀어야 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듯이 말이다. 생각이라는 것을 안 하고 싶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하루가 끝나면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둔다

저녁이 식기 전에

나는 퇴근을 한다


저녁은 서랍 안에서

식어가고 있지만

나는 퇴근을 한다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고


서랍에 넣어 둔 저녁은

아직도 따뜻하다

나는 퇴근을 한다

저녁이 식기 전에


아마도 시인은 저녁 무렵 저녁 배달시켜서 서랍에 넣어 두었으리라. 책상에서 글을 쓰다가 배달 음식을 받아 글을 쓰던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다시 글로 돌아간 것이 자연스럽다. 조금 있다가 일을 멈추고 저녁을 꺼내 옆으로 간다. 옆방이라도 좋다. 책상에서 조금 떨어지는 것이, 지금 하던 일과 생각을 멈추는 것이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는 작가의 퇴근이 되리라. 너무 늦게 일하면 저녁을 거를 수도 있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저녁이 식기 전에) 책상에서 컴퓨터를 닫고 옆방으로 혹은 책상에서 떨어진 곳으로 가서 저녁을 먹어야 하루가 끝나는 것이다.


퇴근을 하면서

저녁을 꺼내어

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

하루의 끝에서


퇴근을 하고

서랍에 넣어 둔 저녁을 꺼내면

하루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나는 퇴근을 한다


퇴근을 하면서

저녁을 꺼내어

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

하루의 끝에서


이제 일에서 멀어져 저녁을 먹으면 하루가 가벼워지고 휴식을 할 수 있고 직장에서 퇴근하는 것이 된다. 같은 방에서라도 일에서 멀어지며 하루를 끝내고 퇴근하는 직장인 같이 쉴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방에서 내일 출근을 하듯이 일을 시작하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오늘은 퇴근이란 것을 하면서 일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


‘서랍에 넣어두는 저녁’ 대신에 작가의 ‘시’로 대치하면 퇴근하는 일은 소설을 쓰는 일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저녁을 먹는 일은 소설과 다른 시를 생각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한강 작가의 첫 시집의 제목이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일까? 시집 제목의 시가 시집에 없는 이유가 이 시집이 작가의 서랍이기 때문이 아닐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약 2주 전인 11월 14일을 전후로 세계 곳곳에서 오로라가 관측되었다. 오로라는 주로 북극과 남극 가까이에…
    문화 2025-11-28 
     박인애 (시인, 수필가)교수님과 안국동에서 점심을 먹었다. 바로 옆이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인데, 규모가 작으니 둘러보고 가라고 권해주셨다. 서울에 있는 궁궐은 다 가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운현궁이 빠져있었다. 한국에 살 때 그 앞을 수없이 지나갔음에도 비껴갔던 거…
    문화 2025-11-28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북극이 찬 기단이 북미로 내려오면서 달라스는 예전의 시간을 되찾은 듯 연일 쌀쌀한 날씨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 온기를 서로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비록 우리의 온기를 다 줄 수는 없지만 …
    문화 2025-11-28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역사와 전통의 이상 문학상 주관사가 바뀌고 난 뒤 출간된 2025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나는 지난 6월 서울 방문길에 사왔다. 사실 내가 사보고 싶은 책은 따로 있었는데, 숙소 부근에 있던 양재동 동네서점엘 갔더니, 정말이지 서적이 별로 없었…
    문화 2025-11-24 
    고대진 작가◈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순대와 …
    문화 2025-11-21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텍사스의 가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따스한 가을의 속삭임이 서서히 지나가는가 싶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날마다 대지의 푸르름을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픈지 계절의 순리를 거부하던 텍사스의 10월의 날씨는 이제 구름 한 점이 …
    문화 2025-11-21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벌써 가을의 문턱이 우리의 삶 깊숙한 곳까지 내려앉아 11월의 시간을 향한 발걸음을 바쁘게 재촉하고 있습니다. 가을이라는 설레는 계절에 우리의 일터를 잠시 탈출하여 곳곳에서 삶을 재 충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쉼이란 것은 삶의 정지라…
    문화 2025-11-07 
    김미희 시인 / 수필가코피가 터졌다. 몸이 보낸 긴급 신호였다. 여전히 삼십 대인 줄 알고 몸을 몰아붙이는 날들이 많았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운동을 시작한 지 한 달, 주 1회 두 시간 반의 변화 속에서 터진 코피였다. 몸이 나에게…
    문화 2025-11-07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길을 무심코 떠나면 그간 내 머리 속을 빙빙 돌며 삶의 많은 부분을 고민하게 했던 많은 부분들이 어느새 까마득하게 잊혀지고 그 속엔 내가 알 수 없는 평안함이 자리를 합니다. 여행길을 통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
    문화 2025-10-31 
    박인애 (시인, 수필가)13년 만에 부활한 MBC 대학가요제가 지난 3일 부산 국립한국해양대학교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본방 사수하겠다는 생각으로 26일 10시 50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198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던 대학가요제가 시청률 저조라는 이유로…
    문화 2025-10-31 
    공학박사 박우람 서울대 기계공학 학사, 석사미국 Johns Hopkins 대학 기계공학 박사UT Dallas 기계공학과 교수재미한인과학기술다 협회 북텍사스 지부장자녀를 낳아 키워보면 알 수 있다. 자식은 부모를 닮지만, 부모가 가지지 않은 면도 많이 가지게 된다는 것을…
    문화 2025-10-24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지극히 맑고 푸르른 가을하늘 아래서 곱게 물든 길가의 아련한 추억들을 가슴에 깊이 새기며 써 놓은 가을의 언어는 벌써 새벽 앞에 손을 비비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간직했던 추억 가운데 가을과 연관되는 …
    문화 2025-10-24 
    고대진 작가◈ 제주 출신◈ 연세대, 워싱턴대 통계학 박사◈ 버지니아 의과대학 교수, 텍사스 대학 , (샌안토니오) 교수, 현 텍사스 대학 명예교수◈ 미주 문학, 창조 문학,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무원 문학상, 미주 가톨릭문학상◈ 에세이집 <순대와 …
    문화 2025-10-17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살포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 내내 묵은 때들이 훌훌 말끔히 벗겨지고 대지엔 생동감 넘치는 계절의 푸르름이 더하고 있습니다. 달콤한 와플에 커피 한 잔 마시며 밤새 들리는 한 줄기의 빗소리 속에 찾아오는 삶의 징검다리를…
    문화 2025-10-17 
    오종찬(달라스 한국문화원 원장, 작곡가)음악을 즐긴다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배움의 기쁨이 있고, 생활의 여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스승이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중의 하나는 내가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
    문화 2025-10-10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