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문가칼럼

[백경혜] 친정

페이지 정보

작성자 NEWS
문화 댓글 0건 조회 17회 작성일 25-01-03 11:52

본문

 백경혜 수필가


친정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선물로 들고 간 간식들을 좋아하셨다. 그중 몇 가지는 방으로 가져가 숨겨두셨다. 치매 증세 중 하나인 줄 알았지만, 아버지 방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간식 봉지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언니가 먼저 사다 놓은 간식 옆에 내 선물이 나란히 놓였다. 구순을 넘긴 아버지는 기억력이 조금 흐려지셨지만, 소통에는 아직 문제가 없었다. 어머니는 여러 종류의 나물을 밥상에 올리셨다. 두릅, 미나리무침, 쑥갓무침, 머위무침과 쑥국은 봄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향긋한 나물로 차려진 풀빛 밥상을 보니 내 나라에 돌아온 실감이 났다.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라 더 귀했다. 

  나는 나물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데쳐서 무쳐놓으면 흑록색으로 늘어진 모양새를 하고 마니, 맛과 향만으로는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유난히 맛있는 것은 이름을 물어보지만, 그것도 머리에서 머물다 사라지기 일쑤이다. 조리해 먹을 것 같지 않다고 무의식이 알아서 기억을 삭제하는 모양이다. 어머니 음식이 기다리는 친정이 없다면 나물 이름을 더 열심히 외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은 재개발을 기다리는 낡은 주택에서 살고 계신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새로 지어 들어갔으니 사십 년 된 집이다. 그곳에서는 시간의 일부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벽에 걸린 액자 속엔 어린 세 남매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에서 난 단발머리 초등학생으로 세발자전거 뒷자리에 동생을 태우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자전거를 빙 둘러 그리운 동네 친구들과 언니가 서 있다. 아버지 환갑 기념 가족사진도 있다. 몇 해 전 결혼한 조카가 돌 지난 아기로 할아버지 품 안에 안겨 있다. 환갑 때 아버지는 너무 젊어서 낯설기까지 하다. 

  어머니는 오래된 내 물건들을 정리하라고 하셨다. 장롱에는 이십 대에 구입한 내 캐시미어 코트가 아직도 보관되어 있었다. 살펴보니 여기저기에 좀이 쏠아 작은 구멍들이 보였다. 오래된 가방의 스웨이드 안감엔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못 쓰게 된 내 옷과 소지품들을 쓰레기봉투에 넣으니 멈추어 있던 시간의 한 부분이 스러져 가는 것 같았다. 


  친정에서 며칠은 마냥 반갑고 즐겁지만, 기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힘들어진다. 다 커서 독립한 새가 좁은 어미 새 둥지로 다시 비집고 들어온 꼴이리라. 귀국한 다음 날부터 부모님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추우니까 옷을 더 입어라.” “친구들은 왜 그렇게 많이 만나고 다니느냐.” “저녁에 일찍 일찍 들어와라.” 

  나이 오십을 훌쩍 넘긴 딸 어디가 아까워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두 분만 적적하게 지내던 중에 모처럼 집중할 대상이 나타났으니, 그것은 재미가 진진한 부모 역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옷을 더 껴입으라는 성화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갱년기 딸내미의 목덜미를 보여드리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양심대로 행동하는 분이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셨다.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할 사람이 아님을 평생 지켜보았다. 나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다고 하셨다. 평생 미덥지 않은 자식으로 비쳤나 보다. 하지만, 시대에 맞지 않는 행동을 강요하실 때는 말 문이 막혔다. 삼십 년 이상 세대 차이가 나는 데다 외국에서 십여 년을 떨어져 살았으니,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팔십 대 중반쯤부터 부모님은 해가 갈수록 눈에 띄게 노쇠해지신다. 아버지는 올해로 구십일 세가 되셨다. 윗니가 여섯 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틀니를 싫어하셔서 앞니로만 음식을 씹으셨다. 어머니가 무른 음식으로 식사를 준비하지만, 다양한 음식을 드시지 못하여 작년보다는 좀 야위었다. 몇 해 전 찾아온 뇌경색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데, 하루 몇 시간씩 주간보호센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아침에 조반을 드시고 나면 현관에 있는 의자에 앉아 얌전한 아이처럼 센터 셔틀버스를 기다리셨다. 아버지의 등이 작년보다 더 조그마해졌다. 


   친정(親庭)은 시집간 여자의 친부모가 사는 집을 말하지만, 그 한자를 살펴보면 ‘친할’ 친(親)자에 ‘정원’ 정(庭)자이다. 친근하게 쉬었다 올 수 있는 정원 같은 곳이라는 뜻일까. 내게 친정은 언제나 환영받고, 무엇도 기꺼이 내어주는 너그러운 곳이다. 정원 정(庭)을 쓴 이유는 출가한 여인이 마음을 접고 시집간 가정에 집중하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 뜰은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일 뿐, 성인이 되어 떠나간 자식과 부모는 그렇게 분리되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약하디약한 두 분을 두고 그곳을 떠나왔다. 안 보면 잊어버리고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 뒷바라지가 끝나지 않은 자식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는 것은 어찌 보면 잔인한 일이다.


  내 하나뿐인 ‘친근한 뜨락’은 점점 더 작아지고 쇠퇴해 간다. 나물 이름 따위는 외우지 않으려는데 우리 어머니는 자꾸만 집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신다. 가족으로 얽혀 산 세월의 길이만큼 회복되지 못한 상처도 남아 있지만, 스러져 가는 부모님 인생을 생각하면 후회 없이 사랑만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아버지가 눈에 밟혀 내년 이맘때는 또 비행기 티켓을 살지도 모르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문가칼럼 목록
    박혜자 미주작가 / 칼럼리스트크리스마스 연휴부터 새해까지 작은아들이 있는 오스틴에 머물렀다. 가까운 거리이긴 하지만 자주가지는 못했는데, 아이가 일년 여에 걸쳐 지은 새집이 완성되었다 하여 겸사겸사 가게 되었다. 이제 서른 중반에 든 아이는 아직 결혼할 마음이 없어서 …
    문화 2025-01-10 
    공인 회계사 서윤교2025년 새해가 시작됐다. 대한민국은 비상계엄, 대통령 탄핵, 여객기 사고 등 다른 나라에서는 30년 동안에 일어날법한 일들이 불과 1달 안에 발생하는 초유의 사태로 우울하게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특히 달러 대비 원화의 약세가 두드러지는데 지난 주말…
    세무회계 2025-01-10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미국의 곳곳을 여행할 때에 계절마다 이어지는 예술인의 축제가 있는 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평소 여행을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 가운데 특별한 자신의 자화상을 투영하는 것에 많은 희열을 안겨다 줍니다. 산타페, 세도나 등, …
    문화 2025-01-10 
    이광익 (Kevin Lee Company 보험사 대표)집에서 고용한 사람의 부상과 보상신문을 읽다보면 가정집의 관리 유지를 위하여 고용한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 제공자들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집 주인이 법적 보상책임을 떠 맡아야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
    보험 2025-01-10 
    Hmart 이주용 차장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갈비는 고기 부위 중 하나로, 갈비뼈와 그 주변의 고기 부분을 의미합니다. 주로 바비큐나 구이 요리에 사용되며, 부드럽고 육즙이 많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고기입니다. 육질이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특징이며, 보통 양념…
    문화 2025-01-10 
    박운서 CPA는 회계 / 세무전문가이고 관련한 질의는 214-366-3413으로 가능하다.  Email : swoonpak@yahoo.com2625 Old Denton Rd. #508Carrollton, TX 75007지난 한해 특별히 바다건너 고국은 그야말로 더 이상…
    부동산 2025-01-03 
     백경혜 수필가친정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선물로 들고 간 간식들을 좋아하셨다. 그중 몇 가지는 방으로 가져가 숨겨두셨다. 치매 증세 중 하나인 줄 알았지만, 아버지 방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간식 봉지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언니가 먼저 사다 놓은 간식 옆에 내 선물이…
    문화 2025-01-03 
     상업용 투자 전문가 에드워드 최2025년 미국 상업용 부동산 시장은 경제 및 기술 변화, 근무 형태의 전환,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 증가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투자자들은 시장의 변화를 면밀히 분석하고, 구체적인 전략…
    부동산 2025-01-03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음악과 책과 여행이 어울리는 계절, 이 계절에 지나간 많은 시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살며시 나의 눈에 눈물을 고이게 하지만 점점 깊어가는 계절의 속내음이 내 가슴속을 품게 하고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이…
    문화 2025-01-03 
    김미희 시인 / 수필가 “세월이 유수와 같다.”라는 말이 정말 실감 나게 한 해였다. 2024년도 일주일 정도 남았으니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된 것 같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에 발을 맞추다 보니 정신없이 살았다. 얼떨결에 맡아버린 민주평통 간사와 한인회 부회장 직함을…
    문화 2024-12-27 
    공인 회계사 서윤교2024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이맘때쯤이면 다가오는 새해의 계획보다도 앞으로 남은 며칠 동안 2024년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 2024년도 세금보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특히 올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4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비트…
    세무회계 2024-12-27 
    오종찬(작곡가, 달라스 한국문화원장)세상의 조명이 모두 꺼지는 날 차가워진 몸과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빛이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조그만 빛 하나가 세상을 비출 때 우리는 서로의 미소를 창가에 살며시 걸어놓고 내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이웃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점점…
    문화 2024-12-27 
    이광익 (Kevin Lee Company 보험사 대표)사고 자동차와  폐차대부분의 충돌사고는 자동차를 수리해서 다시 쓸 수 있는 만큼 경미하지만 전체 사고의 일정한 비율은 자동차가 폐차되는 대형사고에 해당된다.  고객의 사고처리를 돕다보면 사고로 차를 폐차 처분해야 한…
    보험 2024-12-27 
    Hmart 이주용 차장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크리스마스에 가족들과 즐길 수 있는 디저트 2가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번째로는 파네토네(PANETTONE)라는 빵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조금 생소할 수 있지만 서양인들에게는 연말에 빠트릴 수 없는 디저트입니다. 서양마…
    문화 2024-12-27 
    조나단 김(Johnathan Kim)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졸업- 現 핀테크 기업 실리콘밸리   전략운영 이사실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부모의 역할대학 합격 대기자 명단(college waitlist)에 오르게 된 소식을 부모와 자녀가 접하는 순간은 매우 실…
    교육상담 2024-12-27 

검색